1. 필립 존슨은 누구일까
1906년 미국의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난 필립존슨은 변호사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매우 유복 한 가정에서 지내왔다. 뉴욕의 유명한 고등학교를 다니고 하버드대에 입학하여 철학과 인문학을 전공했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유럽의 건축여행을 떠난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오래된 건축물, 프랑스의 유명한 고딕양식의 성당들을 둘러보게 된다. 마침 헨리러셀 히치콕의 소개로 르 꼬르뷔지에와 발터 그로피우스의 건축을 처음 눈으로 접하게 된다. 1928년 미스 반데어로에가 작업 중에 있었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설계도 직접 보게 되는데 그것이 미스 반데어로에와의 인연이 시작되는 계기였다. 1930년에는 뉴욕의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의 건축담당 큐레이터로 일하게 되면서 당시 현대미술관에서 유럽에서 봤던 새로운 건축물들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건축전시를 개최하게 된다. 히치콕과 알프레드 바와 함께 준비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정말 보지 못했던 새로운 건축이었는데 그 전시는 '인터내셔널 스타일 : 1922년 이후의 건축'이다. 같은 이름의 책도 발행하게 된다. 이 책의 표지 사진으로 미스 반데어로어의 빌라 투겐하트의 사진을 사용하였다.
2. 필립존슨의 일탈?
필립존슨은 1936년에 잠시 현대미술관에서 그만두고 나와 나치즘에 빠져 독일의 나치당 시위를 독일에 가서 직접 취재했다. 그에게 잠깐의 일탈이었던 이 사건은 결국 FBI의 조사를 받았지만 경미하다고 판단되어 기소되지 않았고 그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워 하며 경거망동이라며 사과를 했다.
3. 미스 반데어로에와의 관계?
유럽에서 귀국한 필립존슨은 다시 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로 돌아갔다. 독일의 나치정권의 장악으로 인해 미스 반데어로에가 미국으로 망명했을 당시 필립 존슨이 행정수속 등의 과정을 도와주어 순조롭게 미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스 반데어로에는 아머인스티튜트의 학장으로 부임되어 시카고로 향하게 되었고 동부로 향한 마르셀 브루이어도 필립 존슨이 같이 도와주었다. 그런 필립 존슨은 1941년 건축공부를 하기 위해 다시 하버드의 GSD에 입학하게 된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35살이었다. 그곳에서 발터 그로피우스와 마르셀 브루이어 밑에 들어가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이미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필립 존슨은 하버드 대학교 근처에 인터내셔널 스타일의 작은 집을 짓고 그것을 석사논문 졸업과제로 사용했다. 그는 2차대전에 참전하고 그 뒤에도 다시 현대미술관으로 복귀한다. 그의 나이 40세, 미스 반데어로에의 건축전시를 준비하면서 미스 반데어로에가 설계 중이었던 판스워스 주택의 설계도를 보게 된다. 이곳에서 영감을 얻어 코네티컷 뉴케이넌에 자신이 직접 살기 위한 주택을 짓게 된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글라스 하우스'이다. 글라스하우스는 필립존슨 본인이 주거할 목적으로 설계하여 공사를 빠르게 진행시켰고 결국 판스워스 하우스보다 더 빨리 준공되었다. 1949년 43세에 그는 언론에 알려져 매우 유명해지자 미스 반데어로에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물론 미스 반데어로에의 판스워스 주택과 필립존슨의 글라스하우스는 형태는 다르지만 첫 번째 유리로 지어진 글라스하우스가 미스 반데어로에 본인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 필립존슨이 도둑질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립 존슨은 여전히 미스 반데어로에를 존경하기에 그의 글라스하우스 안에 들어가는 가구들은 모두 미스 반데어로에의 바르셀로나체어와 테이블이었다. 지금도 그 가구들을 그대로 보존 중이다. 필립존슨은 후에 글라스하우스를 포함한 단지 전체를 사후에 기증하면서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필립존슨은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물려받아 뉴케이넌 외곽 숲속의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처음 글라스하우스를 지을 당시에 작은 땅이었지만, 점차 땅을 더 매입하여 현재의 규모만큼 단지가 커졌다. 현재는 연못과 파빌리온, 수영장 등 완전한 야외 미술공원을 가진 대규모 유원지와 같다. 유명한 건축가나 저명한 인사들을 초청하는 사교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프랭크로이드 라이트와 미스 반데어로에도 다녀왔다. 미스는 그의 글라스하우스를 보고 핫도그를 파는 가판대 같다고 훗날 비아냥대기도 했다. 1952년 뉴욕에 지어지는 시그램빌딩의 설계자를 정하는데에 있어서 필립존슨이 시그램 회장의 딸 필립스 램버트를 설득하여 르 꼬르뷔지에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제치고 미스 반데어로에가 당선되도록 하는데에 약간의 역할을 했다는 말이 있다. 미스는 그것의 대가로 시그램빌딩 내의 포시즌스 레스토랑 인테리어 설계를 필립 존슨에게 맡기게 되었는데, 1956년 준공된 시그램빌딩은 훗날까지 이어지는 시대의 명작이 되었다. 1953년에 필립존슨은 자신이 근무하던 현대미술관의 조각공원을 설계한다. 또한 링컨센터의 뉴욕 스테이트 극장을 설계하기도 하면서 미스 반데어로에의 아래에서 점점 벗어나 자기 스스로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후에 존 버지와 파트너가 된 필립 존슨은 미국 전역을 누비게 되는 유명한 스타건축가가 되었다.
4. 필립 존슨의 모더니즘을 향한 배신
그는 70년대에 불어온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람에 영향을 받아 미스 반데어로에의 모더니즘을 외면하고 제임스 스털링, 마이클 그레이브스 등의 포스트 모던 작품들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곧 그가 공개한 뉴욕 맨해튼의 치펜데일 하이보이 설계를 공개하면서 자신이 시작하고 사랑했던 국제주의 양식의 모더니즘과 결별한다고 선언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 이상 less is more가 아니라 less is bore라고 외치던 것이었다. 모더니즘주의의 건축가들이나 지지자들에게는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행보는 그대로 이어지게 되었고 프랑스 여행 당시 고딕양식의 성당에 영향을 받았는지 자신의 작품에 계속해서 고딕양식의 요소들을 적용하는 모습이 보였다.
모더니즘에 벗어나다, 포스트 모더니즘
1. 포스트모더니즘 개요 포스트 모더니즘은 말 그대로 근대주의, 모더니즘의 반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Post'를 'After'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모더니즘 이후에 발현된 많은 경향을 지칭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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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독특한 행보들로 인해 필립존슨의 평가는 엇갈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프리츠커 상의 초대 수상자인 만큼 건축계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그의 행보가 좋았다고 평가받던, 안 좋다고 평가받던 그는 후대에 이름을 날릴 만큼의 충분한 영향력과 건축계의 파장을 불러온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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