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꼬르뷔지에라는 그의 이름은 건축학과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많이 들어봤을 수 있다. 디자인에 관심이 있거나 가구에 관심이 있다면 충분히 들어봤을 이름인데 과연 그는 누구길래 이렇게 유명할까?
1. 르 꼬르뷔지에? 샤를 에두라르 잔레그리?
꼬르뷔지에는 스위스태생의 프랑스 건축가로서 1887년에 태어나 현대건축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현대 디자인의 이론적 연구에 있어서 많은 영감을 주었던 선구자이며 도시의 거주민들을 위한 새로운 주거의 시스템을 만들고 개선하는 데에 있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였다. 약 50여 년 동안 활동하면서 중앙 유럽, 인도, 러시아, 등에 자신의 건물을 세웠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에도 여러 건묵을 지었다. 그는 건축물뿐만 아니라 도시계획가로서 도시이론을 펼치기도 하였으며, 화가, 조각가, 가구디자이너로서의 활동도 틈틈이 해왔다. 꼬르뷔지에라는 이름은 사실 필명이며 본명은 잔레그리가 맞다. 가구디자인을 공부하거나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피에르 잔느레'는 사실 꼬르뷔지에와 사촌지간이다. 아마 잔레그리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흠칫 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2. 꼬르뷔지에의 성장기
그는 어려서부터 시각적인 예술에 흥미를 갖게 되어 라쇼드퐁 미술학교에서 '샤를 레플라트니에'의 밑에서 공부하였는데, 이 학교의 건축 교사는 '르네 샤팔라'라는건축가로써, 후에 꼬르뷔지에의 초기 주택 디자인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젊은 시절, 지방적인 동네의 문화에서 벗어나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행했다. 그러던중 1907년에 프랑스에 있는 철근 콘크리트의 선구자 '오귀스트 페레'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였다. 그 후에는 베를린 근처에 위치한 '피터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미스 반데어로에와 발터 그로피우스를 만났으며, 일하는 과정 속에서 독일어를 익힐 수 있었다. 이렇듯 그는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인상 깊은 경험을 할 수 있었는데 그것들은 후에 그의 건축실무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쳤다. 그 후에는 발칸반도를 여행하면서 그리스와 터키를 방문하여 자신이 돌아다니며 관람한 곳들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후에 저서에서 언급하며 칭송했던 파르테논 신전을 그린 스케치들도 있었다.
3. 꼬르뷔지에의 새내기 시절
세계는 1차대전을 겪게 되면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는 시기에 꼬르뷔지에는 모교였던 라쇼드퐁 미술학교에서 강의를 했었다. 4년간 스위스에서 지내며 현대기술을 이용한 건축 이론을 연구하였고 그때 연구의 결과물 중 하나가 현재 다수의 건축학과 학생들이 배우는 '돔 이노 시스템'이다. 그는 이 형태를 통해 최소한의 얇은 철근 콘크리트 기둥들이 모서리에 위치하며 어느 한쪽에서 각 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계단을 지닌 개방적인 평면 구조를 제안했다. 그 후 약 10년 동안 대부분 그가 진행해 온 프로젝트에는 이 '돔 이노 시스템'을 기반으로 진행하였다. 그는 한때는 그의 사촌이자 가구디자이너인 '피에르 잔레'와 함께 건축실무를 하기도 하였으며, 후에는 입체파 화가로 알려진 '아메데 오장팡'을 만나 서로 공통된 관심사를 알아보게 되어 둘은 합동작업을 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둘은 이성적인 것에서 벗어나고 낭만적이라는 이유로 '순수주의'라고 제창하는 새로운 미술운동을 시작하며 순수주의 잡지인 '레스프리 누보'를 창간하기도 하였다.
4. 꼬르뷔지에의 변신
그는 1920년에 본명이었던 샤를 에두아르 잔레라는 이름을 두고 르 꼬르뷔지에라는 필명으로 첫 기사를 발행한다. 그 이름은 그의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와 변형한 것인데 그 당시 성과 이름의 구분 없이 하나의 이름을 갖는 것은 당시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들에게 유행 같은 것이었다. 1918년부터 1922년동안에 그는 건축 프로젝트를 하지 않고 오로지 순수주의 이론과 그림을 그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의 이론적인 연구는 많은 단일가구들을 위한 주택 모형으로 발전했다.
5. 도시계획가 꼬르뷔지에
수 년동안 프랑스는 파리의 빈민가에 안 좋은 일들이 늘어나는 현상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꼬르뷔지에는 그러한 문제를 도시적인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결국 그 대응책은 주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주택위기에 처한 도시를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주거를 제공할 효율적인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건축 형태가 하층민들의 삶의 질을 회복하는 데에 구조적인 해결방안이 될 것이라고 보았고 결국 Immeubles Villas라는 세포와 같은 공동주택이 모인 집합건물을 제시했다. 이 건물은 거실과 침실, 주방, 테라스정원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몇 가지의 집합주거 건물을 설계한 뒤에 그는 도시 전체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1922년 그는 새로운 현대도시의 계획안을 내놓게 되는데 이 계획안은 십자가 모양의 평면을 가진 60층의 고층건물들이 밀집한 것으로, 각 건물은 거대한 유리의 커튼월로 둘러싸여 있는 사무용 건물이다. 이런 고층건물들은 직사각형 형태의 넓은 공터에 지어지는데 한가운데에는 교통의 중심이 있어서 각각 층에 철도나 터미널, 교차로가 위치하고 맨 위에는 공항이 위치한다. 또한 그는 인도와 차도를 분리함으로써 교통수단으로써의 자동차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십자건물들 뒤로는 지그재그 모양의 낮은 건물들이 길에서 멀리 위치한 녹지 중아에 배치되어 주민들이 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사회전반 자체를 재구성하기 위해 미국식 공업 모델에서 착안한 전략을 가지고 프랑스 정치에 관심이 있는 대기업 운영자들이 선구자가 되기를 바랐다. 결국 그는 유명한 자동차 제조업체의 지지를 받아 이러한 계획을 전시하게 되었다. 센강 북쪽의 파리 중심부를 거의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격자 도로와 자신의 현대도시에서 가져온 60층의 십자 건물을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대다수의 기업가나 정치인들은 그의 테일러적인 발상에 동의하였지만, 그의 계획안에는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계속해서 학계에 남아 현재의 도시의 지저분하고 불결한 환경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담론을 불러일으켰다. 후에 그는 자신의 현대도시계획을 다듬어 빛나는 도시라는 이름으로 출판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후에 그는 여러 위니테들을 프랑스 각지에 건축하여 그의 작은 도시계획안을 구현하려고 노력했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유니테 다비타시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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