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세기에 있어 역사주의 양식의 가치
약 20세기 중엽까지 다양한 근대건축 운동은 일반 대중들로부터는 매우 전위적인 작품들로 받아들여졌다. 사회적으로 평가되고 있던 것은 당연히 역사주의 양식에 근거한 건축이었다. 하지만 역사 양식도 역시 굳건한 반석 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역사 양식은 사회적 가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는 일단 위약했다. 그리고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진전은 양식의 의미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말하자면, '교양으로서의 양식'으로부터 '기호로서의 양식'으로의 변화였다. 즉, 산업혁명 이후 도시화와 대중화에 의해 건축에 대한 교양은 저하되었으며, 변질되었다. 새로운 건물 유형이 속속 나타났고, 양식은 자주 본래의 문법으로부터 일탈되었다. 그리고 또한 건축을 이용하여 향수를 누린 계층의 확산에 의해 미묘한 기호로서 보다는 강한 연출효과가 추구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보다 집약적으로 나타났던 것이 오피스 빌딩이다. 임대사무소 건축의 평가는 임대수익의 많고 적음에 의해 결정된다. 그랬을 때, 평면게획은 일반적인 기능 충족의 차원을 초월하여 렌터블 비를 어떻게 높일 것인가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하며, 공기에 대해서도 건설비용의 감축을 목적으로 공기 단축의 노력이 필요했다. 디자인이나 심미성보다는 입주를 희망하는 사람을 유인하는 호소력이 판단의 근거가 된 것이다. 말하자면 오피스 빌딩의 출현이 건축에 경제 합리성의 발상을 유도했던 것이다. 여기에 추가로 대지의 지가가 연관지어지면, 건물은 고층화와 거대화를 꾀하게 된다. 이것은 양식적인 완성을 완전히 무력화해 버린다. 동시에 건물의 기능은 엘리베이터나 공조 기기와 같은 기계설비에 의존하는 상황을 야기했다. 결과적으로 정제된 양식미의 달성을 건축의 이상으로 삼던 시대는 끝이 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식은 필요로 했다.
2. 아르데코의 성행
1925년, 파리에서 '근대장식미술, 공업미술 국제박람회'가 개최되었다. 이를 줄여서 '아르데코 박람회'라고 부른다. '장식미술', '공업미술'이라는 막연한 단어로 받아들여지지만, 실제로 그 내용은 건축, 가구, 조명, 패션, 정원, 사진, 영화 등 매우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으며, 현재의 용어로 말하면 '응용미술'이라 불러야 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파빌리온을 포함한 전시물 중에 대부분은 하나의 공통적인 미의식이 흐르고 있다. 직방체를 조합시킨 듯한 기하학적 형태, 직선과 원호가 지그재그 모양이나 열쇠모양으로 연속되는 장식패턴, 금속과 유리등이 만들어내는 표층적이고 균질한 질감 등, 이러한 특징을 갖는 조형은 유럽으로부터 미국 그리고 극동지역을 석권하고 있었다. 그중 더욱 심각하게 확장되었던 것은 공예디자인과 그래픽 디자인의 세계이다. 즉, 대량생산되어 불특정 다수에 의해 소비되는 상품이 아르데코의 표층을 이루고 있었다. 다음으로 이러한 조형을 받아들인 분야가 건축장식 분야였다. '장식'이라 이름한 것은 아르데코의 고유한 매력이 발위된 것이 건축 전체 구성에서보다는 외벽의 부조, 카페트나 커튼월의 패턴, 가구,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은 부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표층적 장식이야 말로 아르데코의 생명이었다. '아르데코'라는 이름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진원지였던 박람회의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그 개최 연도로부터 '1925년 양식'으로도 불렸다. 1920년대는 대중문화가 그 양상을 일변했던 시대였다. 라디오와 영화 그리고 잡지가 사람들의 감수성을 확실히 변화시키고 있었다. '아르데코 박람회'에 나타난 조형은 그러한 시대에 적정한 신선함과 대중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르데코는 상반되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즉, 한편으로는 장식 없이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역사적이고 양식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하학적으로 추상화되는 경향이 강하여 근대주의적이었다. 그 부화기였던 시대는 확실히 분리파 시대였으며, 둘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는 어떤 것이 있었다. 그러나, 분리파에는 명확히 존재했던 수공예성과 물질성, 그것이 가져다주었던 안정감은 아르데코에 와서는 사라지게 되며, 그 대신 공업제품의 차가운 성격과 표면을 선적인 2차원의 운동감이 지배한다. 이러한 다면성에 의해 아르데코는 실제로 많은 나라의 많은 건축가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아르데코의 2대 대표작품이라면, '바터시 발전소'와 '데일리 익스프레스사'라고 할 수 있으며, 각각 위대한 보수파인 '스코트'와 구조디자이너 '오웬 윌리암스'와 같은 서로 양극에 서있는 2명의 건축가가 관여하고 있다. 아르데코의 진원지인 프랑스에서는 이 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건축가들이 아르데코적이었다. 그중에서도 '로베르 밀레 스테반스'의 명성은 '르 꼬르뷔제'를 능가했으며, 연장 70미터의 길 양쪽을 모두 주택으로 설계한 '말레 스테반스 가로'를 완성시켰다. 또한, 독일에서는 '에밀 파렌칸프'의 '뮬르하임 공회당'의 인테리어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아르데코를 가장 환영했던 나라는 파리의 아르데코 박람회에 출품하지 않았던 미국이었는데, 미국은 자국의 공예에는 현대미술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이유로 불참했다. 미국에서 아르데코의 조형적 특성을 보다 잘 나타내는 건축물이라면 '반 알렌'이 설계한 뉴욕의 마천루 초고층빌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벽면의 외장재는 은회색의 타일이며, 입면의 중앙부를 4개의 기둥이 수직으로 관통하여 최상부의 원호에까지 이른다. 그 움직임은 7단의 돔에 의해 가속화되며 정상부의 첨탑으로부터 하늘로 찌르듯 솟아있다. 돔은 지그재그 모양이 뾰족한 삼각형으로 파여있으며, 스테인레스강으로 처리되어 빛나고 있다. 외피의 금속광택에 의해 건물의 중량감이 해소되며, 평활한 운동성만을 보여주는 이 건물의 모습은 정확히 기계라고 해야 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아르데코는 전쟁기간 중 미증유의 경제적 번영을 상징하는 조형이었다. 역사적 양식에 기계문명이 가져다준 새로운 미의식을 반영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근대주의의 추상성이 혁명적이었기 때문에 편협함을 내포하고 있었던 반면, 아르데코는 기계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친숙케 했으며 동시에 시작적인 쾌락과 소비사회의 화려한 미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아르데코는 근대주의의 성숙에 의해 구가된다. 근대주의가 '공간의 볼륨'으로 표현의 중심을 옮겼을 때, 표층을 강조한 아르데코의 쾌락주의는 양식주의로 평가되지 않는 하나의 반동으로서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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