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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지식 모음

감응의 건축, 정기용 건축가

by 이다자 2023. 2. 11.

가난할 줄 아는 자의 아름다움을 얘기한 승효상 건축가와 더불어 또 한명의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드려고 했던, 더불어 사는 삶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서민의 건축가 정기용에 대해서 알아보자.

 

정기용 건축가의 생애

1945년 충청북도 영동에서 태어난 정기용은 서울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뒤 1971년 동 대학원 공예과를 졸업한 그는 1972년 프랑스 정부의 장학생으로 초청받아 파리 국립장식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실내 건축학을 전공했다. 이렇게 끊임없이 예술이라는 분야에 있어서 학습에 몰두했던 그는 당시 미술대학 학장이었던 김세중을 통해 학교에 출강한 김수근 건축가를 만나게 되었고 그때 처음 건축이라는 것을 접하게 되었다. 뒤에 19세기 영국의 건축가 윌리엄 모리스의 자서전을 읽고 건축공부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떠난 곳이 파리였다. 실내건축학을 공부한 뒤에 파리 제6대학에서 건축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공인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이후 1985년까지 계속해서 파리에 있으면서 건축, 인테리어 사무실을 운영했으며, 파리 제8대학교 도시계획과에서도 공부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순수예술에서 시작하여 건축을 통해 도시까지 이어지는 스케일이 확장되는 학습을 꾸준히 이어갔다.

 

건축가의 정신

프랑스에서 유학중이던 그는 잠시 한국에 방문했을 당시, 한국의 문화에 충격을 받았다. 기존의 한국건축이 가진 초가지붕을 뜯어내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천편일률적으로 바꾸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으며 '새마을운동은 삶과 역사를 부정하게 만드는 문화적인 학살'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농촌 경제와 시골의 문화를 공부하고 흙으로 집을 짓는 흙집 기술을 익혔다. 그렇게 그는 1985년 충청남도 예산군 구억마을에 있는 장순옹 장인에게 기술을 전수받기 시작했고 그 해에 완전히 귀국하여 홍익대학교 앞에 기용건축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후 기용건축사무소는 여러 사무소와 통합하고 여의도와 구기동 등으로 옮겨다니다가 명륜동에 기용건축 건축사사무소로 자리잡게 된다. '건축은 삶을 조직화하는 것'이라는 철학을 갖고 본래 자연이 가진 환경적인 요소와 사람이 살던 삶의 형태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지향점을 갖고 여러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그렇게 처음 맡게된 프로젝트에서 고층 빌딩의 중간층 하나를 통째로 외부의 일반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쉼터와 예술공간으로 만들었다. 이후 그는 다수의 공공프로젝트에 참여하는데, 대표적으로 약 10년동안 진행된 무주 공공 프로젝트로 자연상태의 나무를 활용한 공설운동장, 펑문대, 면사무소, 공중 목욕탕 등이 있다. 그중 재미있는 일화들이 있는데, 무주 공설운동장의 스탠드설계 당시 군수는 마을 주민 어르신들에게 행사에 참여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주민들 다수의 참여율이 저조했었다. 정기용 건축가는 그 이유를 주민들에게 물어보자 군수 혼자 햇볕을 피해 그늘아래에 앉아있고 그 행사에 참여하는 모든 주민들은 그늘막없이 오랜 시간 앉아있어야 하기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건축적인 구조물이나 설치물을 이용해 해결하기 보다는 자연적인 요소를 활용하고자 스탠드에 등나무를 심고 등나무가 자라 가지를뻗어서 서로 얽혀 그늘막을 만들 수 있도록 간단한 구조물만 세워두었다. 그렇게 주민들이 행사에 참여했을 때, 그늘을 피해 쉬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또다른 일화중 하나는 그가 무주의 안성면 주민자치센터를 계획할 당시에 안성면의 다수의 주민들이 노인분들이었기에 노인분들에게 어떤 공간이 필요한지 한 분 한 분께 여쭤보니,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하거나 되려 건물을 짓지 말라고 하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다 결국 들었던 노인분들이 필요한 시설은 목욕탕이었다. 다수의 관리자들 입장에서는 사랑방같이 노인분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공간을 이용하게 될 노인분들이 필요로 하는 공간은 따듯하게 몸을 녹이고 쌓인 피로를 풀 수 있는 목욕탕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주민자치센터 내부에 목욕탕을 만들기도 하였다. MBC에서 진행한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에서 순천, 진해, 제주, 서귀포, 정읍, 김해에 총 6개의 어린이도서관을 설계하였다. 그중에 정읍에 있는 기적의 도서관을 설계하면서 '원래 건축가가 하는 일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요구를 공간으로 번역하는 것이지 없던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였다. 그 외에도 2007년에는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봉하마을 사저를 설계하였고, 2010년에 개관한 '박경리 문학의 집' 등을 설계하였다. 1992년부터 약 2년간 민족건축인협의회의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99년부터는 문화연대 공간 환경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후에도 그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분과위원, 문화연대 공동대표 등을 맡기도 하였고 2005년에는 문화재청 사적분과 문화재위원을 맡았다. 계속해서 문화와 관련된 활동들을 꾸준히 해오던 그는 후학 양성을 위해 서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한양대학교 등에서 건축학과에 출강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렇게 그의 건축일생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철저하게 배려하고 생각하며 작품을 채워나갔다. 마지막까지도 건축가가 할 일은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주는 것 보다 사람들이 기존에 살아가던 방식의 삶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그것들을 의미 있게 조직하여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하며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바탕을 만들어주는데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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